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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믿음
성경의 믿음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annaga입니다.

오늘은,

유튜브에서 흥미로운 제목을 보고 8분짜리 강의 영상이라서 부담 없이 들어가 보게 되었네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라는 영상에 관해서 논해보려고 합니다.


 

1. 개신교 초보 독일인과 성경학자 도올 선생님의 만남

비행기 안에서 만난 어느 독일인과 도올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도올 선생님 옆자리의 독일인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기내에서 계속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한국에 갔을 때 한국교회에서 예수를 믿게 되고 계시를 받았다고 도올에게 말했다고 한다.

도올 선생님은 독일인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독일인은 "예수를 믿고 TV도 보지 않게되고 성생활도 경건해지는 등 자신의 삶이 육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영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도올 선생은 "당신은 예수의 의미를 모른다. 나를 알려면 나와 대화하고 알아가는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알아가야 한다." "성서를 그렇게 초심자가 그냥 읽어서는 예수를 알기가 힘들고 신학자들의 서적이나 연구 업적도 함께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해서 미친 듯이 발광하는 성도들 사이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눈물을 흘린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당신의 개인의 구원을 말한다면 무당을 만나도 해결이 된다. 하지만 십자가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적용이 되어야 하고 열심히 연구를 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교나 유교도 참고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한다."......

라고 말하였고, 독일인은 그 말에 존경을 표하고 감사했다는 스토리이다.

 

2. 믿는다는 것과 증거

형사법에는 증거주의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을 법으로 처분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형법 전서 보다 더 철저한 증거주의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일을 선지자를 통해 알리시고 반드시 증거를 주신다고 경에 되어있다. 영적인 일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것이라면 반드시 증거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올 선생님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믿음직해서 믿는 것처럼 소위 '신뢰한다'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시이고, 믿는다는 것은 계시의 반대편에 있는 성도가 '그 계시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알 듯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버릴 만큼 너희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intro 평안하시죠? annaga입니다. 계시란 무엇입니까? 많은 목사님들은 너무 어렵게만 설명하십니다. 일반 계시, 특별 계시, 직통 계시? 이렇게 나누면서 하나

ssambbang1.tistory.com

 

3. 독일인의 믿음과 증거

초신자 독일인은 도올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하고 논리적인 대답을 유도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변화된 삶을 증거로 말하고 말았다.

여기서 논리적으로나 어학적으로는 독일인이 틀렸다. 독일인의 대답은 일반인에게는 동문서답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화답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에게 생긴 증거에 대해서는 소박하고 자신있게 감사한 마음으로 간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도올은 학자이고 독일인은 신자이다.

 

4. 석학 사도 바울의 간증

도올도 유명한 학자이지만, 사도 바울도 유명한 학자였다. 그도 메시아에 대해서 완벽한 공부가 되어 있었지만, 살아계실 때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비로소 사도가 되었다.

그때에도 누가 바울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학자적인 논증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마섹에서 만난 예수에 대해서 간증했다. 그리고 멀었던 그의 눈이 열렸던 치유를 증거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성서에 대해서 혹은 예수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는 성서학자 따위가 아니라 '신자'였기에 증거로 말했다.

 

도올은 학자이고 바울은 신자이다.

 

적어도 '신앙'이라는 영역은 신자 이외에 학자 따위가 근접할 수 없는 성역이다.

아무리 한 인생을 점철해서 예수를 연구한 학자라 할지라도, 신앙에 있어서는 바로 오늘 아침에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인 어린 신자보다 못한 것이다.

 

5. 신학자는 신자를 죽인다. 

신학자는 '예수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서 많은 책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학자는 예수를 알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자는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포장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집이 세어지고 완고해진다. 이런 것을 성경에서는 '헛된 철학'이라고 한다. 이런 취지로 성경은 "똑똑한 자들은 다 넘어질 거다."라고도 했다.

한편 신학자들은 자기는 평생을 공부해도 모르는 것을 너무나 쉽게 알고 있는 신자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야! 나처럼 계속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모르는데 말이야. 어리석은 당신들은 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 뿐이야."라고 무시한다.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서 직접 만난다면, 오늘날 도올 선생님을 만나는 것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들은 학문에 최고봉이요. 정갈한 삶을 살아온... 누구보다도 존경받을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외부로는 대부분 노출이 된 삶을 살았다. 즉 그들이 가르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 등을 마을 사람들이 늘 지켜보았고, 그들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함께 생활을 했다.

단,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그들은 외식하는 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기준으로는 가장 존경스러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증오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증오했 듯이 영적인 사람은 늘 육적인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다.

 

6. 도올 선생님은 독일인을 죽이려 한다.

그 독일인은 이제 막 예수를 믿게 된 신자다. 신자는 외면적으로는 교회의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서 그 조직의 스케줄대로 인도되고 일정기간을 그곳에서 생활하며 배운다.

하지만 착각을 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교회 조직은 결코 그를 끝까지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를 예수께로 인도한 것도, 그를 하늘나라에 이르도록 끝까지 책임질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일이고 그분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이와 같이 초라해 보이고 어설퍼 보이지만 하나님의 것이 되어있는 자를 감히 어디 신학자 따위가 가르치려 드는가?

신학자가 자기도 모르는 곳으로 신자를 인도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고 오만이다.

만일 막 태어난 하나님의 양을 잠시라도 길을 잃게 한다면 그 책임을 도올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학자의 영은 신자의 영을 늘 죽이려 한다. 마치 굶주린 사자들이 어린 사슴의 주위를 에워싸듯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마치며 

개인적으로 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을 좋아합니다.

그분은 순수한 분이고, 학문을 너무나 사랑하는 학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대정신에 있어서 비겁한 스탠스를 취하신 적이 없는 시원시원한 한국의 지성입니다.

 

오늘의 비판은 영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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