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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없애는 것이 맞다.

십일조-목사
십일조 목사

십일조에 대한 개인적인 에피소드

교회 처음 다니기 시작한 기독교인이 가장 처음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헌금이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는 일종의 '회비'가 필요하는 것은 다 인지하고 있다. 상식이니까...

하지만 월 수입의 10%를 계산해서 교회에 납부하라는 '십일조'는 초심자를 의아하게 만들고, 자칫하면 애써서 전도해서 모시고 온 귀한 영혼 하나를 초장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특히 불경기 때는 그럴 개연성이 크다.

 

한국교회는 힘 있고 유명한 성도들이 자기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누구누구가 그 교회에 다닌다면서?" 하는 말을 들으면 목사나 장로들이 우쭐하고 보람도 느낀다.

유명인 하나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신뢰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돈 좀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신앙생활도 모범적으로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주면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할 것이다.

어려운 신도들 100명보다 잘 나가는 신도 10명이 더 낫다. 적어도 교회 재정의 측면에서는 말이다.

 

필자도 처음 교회에 출석했을 때, 첫 번째 들은 공교롭게도 설교가 십일조 헌금 설교였다. 

그 당시는 개인 사업이 망해가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설교가 첫 설교였다니.... 교회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설교가 끝나고 어떤 집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요즘 월 수입이 마이너스인데, 그렇다면 빚의 10분의 1을 교회에서 받아야 하는 건가요?"

그때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그 집사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 운영 자금이다.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이 수고한 작물과 키운 가축들의 10%를 성막에 바쳐야 했다(레 27:30; 민 18:26; 신 14:24; 고후 31:5). 이것 말고도 사실 구약의 율법은 복수의 십일조를 요구했다(레위인들을 위한 것, 성전과 절기들을 위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 이것들을 합하면 20%도 넘어설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당시 희생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세금 걷는 방법 중 하나다.

anyway 음식을 모았으면 누군가는 소비를 했을 것이다.

성막에 바친다고 했으나 성막이 입이 있어서 가축을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곡물과 고기를 드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가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재정을 하듯이, 이집트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공동체도 운영이 필요하고, 다른 생업을 하지 않고 제사일을 하는 레위인들이 먹고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십일조는 별 다른 의미는 없고 상식적인 이해의 수준이랄까?

 

초대교회도 일종의 경제공동체다.

신약에 들어서서 초대교회를 보면 십일조를 걷었다는 말은 없지만, 헌금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모여서 같이 살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행 4:32) 

나아가 개인 소유의 부동산을 처분한 돈을 모두 교회로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그중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금액을 속이고 조금 덜 가져왔다는 이유로 죽기까지 한다.(행 5:1~11) 
또한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연보라는 것을 걷었다.(롬 15:26) 

결론적으로 작은 사회주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네 것 내 것 업는 경재 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지금 한국교회는 십일조 없이는 교회 운영이 안 된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상황과는 다르다. 

어떤 건물에 모여서 예배를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고대 부족처럼 부락 생활을 같이 하지도 않는다.

모든 물건이나 부동산을 처분해서 사회주의적인 통제 속에서 경제생활을 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사이비 교회나 엉터리 종교집단들은 나중에는 늘 특수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악한 열매를 낳는다.)

 

현대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은 목사에게 캐시로 모여서 그들과 장로들이 교회 운영자금으로 사용한다. 물론 여기에는 목사의 월급이 포함된다. 

간단히 계산을 하면 100명이 십일조를 내면 10명의 수입이 교회에 십일조로 입금된다. 수치상으로는 어마어마하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신도가 꼬박꼬박 십일조를 목사한테 바친다고 하면 "미쳤다"라고 할 것이다.

 

교회는 십일조 말고도 다른 헌금들도 많은데 이들을 다 합산하면 구약시대의 '복수의 십일조'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필자를 가장 열받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교회 목사들이 자기가 받는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헌금의 대부분은 목사 월급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 돈이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초대교회의 바울은 소위 ‘자비량’이라는 개념으로 스스로 돈을 벌며 선교를 했다. 사실 목사들은 일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 된다.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고 늘 설교하면서 자비로 생활비는 벌기가 싫은가 보다.

목사들도 생활인들이라서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렇게 위선적으로 하면 안 된다.

스님도 신부도 돈을 벌면서 성직을 해야 한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스트레스와 멸시를 받고 종교의 위로를 바라는 신도들을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공감하고 설교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묻지 마 팽창주의

우리나라 목사가 성공하려면, 일단 교인들을 많이 모아야 한다. 교인의 수는 유튜버의 구독자 수와 같이 그의 명예를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밥그릇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좋은 말로는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일군이며, 얼마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는지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머리수'이다.

이 '머리수'는 교회를 잘 만드는 재주가 있는 떴다방 목사들이 재빠르게 교회 하나를 개척하고 다른 목사에게 팔아먹을 때 일종의 권리금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한편 이렇게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과 동시에 건물을 되도록 크게 짓고, 여러 개 지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환경을 보고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서 무리한 헌금이 요구되는데, 현금이 없으면 성도 개인 개인 개인이 빚을 져서 건축 헌금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인 수와 건축이 휘몰아치면서 돌아간다. 끊임없이 켜지고 또 커진다. 어느 정도 덩치가 되어서 한계가 올 것 같으면 이제는 해외로 진출하기까지 한다. 세계로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한마디로 재주 있는 한 목사가 개척의 삽을 뜨면 그 후로 끝을 모르는 돈과 전도와 건축의 질주가 시작된다.


십일조가 싫으면 교회 다니지 말아야 하나?

 

일단 십일조는 너무 큰 금액이라서 성도에게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된다. "십일조가 마음에 걸리면 내지 마라! 내기 싫으면 다른 교회 가라!" 이런 헛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일단 없는 사람들에게는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이 정상적이다"라는 설교를 하는 분위기 자체가 상처가 된다.

교회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해 주는 곳이지, 그들을 또 한 번 죽이는 곳이 아니다. 그 돈내기 싫으면 다른 데 가라고?... 어이가 없다. 교회는 목사들의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곧 이 땅의 성도들의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는 다른 헌금들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헌금함 앞에 가면 10개가 넘는 종류의 헌금 봉투가 있다. 저마다 이유가 있는 헌금의 이름들이기는 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초대교회나 예수님이 계시던 회당처럼 헌금함 하나 있으면 족하다. 거기에 교회 운영비를 자신에 형편에 맞기 성의를 보이면 된다. 

그런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지도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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